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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7

제가 지난 20여년 동안 존경하며 따르던 저와는 20 차이가 나는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선배 목사님은 저를 동생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얄미운 조카같이 저를 대해 주셨지만, 저는 선배 목사님을 귀찮은 시어머니처럼 미운 시누이처럼 여기고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소한 일로 이리저리 많이 다투기도 많이 했었습니다.
 
이분은 일찌기 남들이 눈길 주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북한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도움과 협조보다는 오히려 빨갱이손가락질 받으면서,  1995 가뭄과 수해로 만신창이가 북한에 먹을 것을 보내기 위해서 밀가루 보내기 운동을 했고, 북일리노이 연회에 속한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내서 구제품을 모아서 트레일러에 가득 채워서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일이 지금은 우리 교단의 정식 선교프로그램인 오병이어 선교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분과 함께 북한의 국수 공장을 방문하기 위해서 평양에도 여러 다녀왔습니다. 북한선교 여행 중에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을 정도로 용감해서 이북의 사람들이 저희를 며칠간 오도가도 못하게 해서 4일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호텔에만 갇혀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고 무식하게 용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북한에 농사에 비닐 공장을 지어준다고 도문지역에 방문하고 연길을 거쳐, 연길에서 단동까지 늦은 , 택시를 타고 장백산맥 고개길을 구비구비 돌아서 새벽에 도착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 험한 산길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서 등골이 서늘했던 적도 있습니다. 육로로 평양에 들어가기 위해서 단동에서 평양까지 기차를 타고 적이 있는데 이는 선배 목사님이 아니었으면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해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저의 별명이 그분의 가방 모찌였습니다. 비서처럼 보였다는 말이지요. 지난 연회 목사님이 은퇴식을 하셨고, 6 26 35년간 섬기던 교회에서 은퇴를 하셨습니다. 선배 목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젠 목사님에게 하던 거처럼 나에게도 해줘”. 아마도 진실을 몰라서 그러셨던 것입니다. 같이 있으면 하루도 서로 다투지 않은 날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이의 우정은 꽤나 악명이 높습니다. 그것이 부러워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한국으로 떠나십니다. 마음 편이 무너지는 같고, 목사님과 이별의 허그를 하는데 눈물이 같아서 살짝 외면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만남은 이별은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한국에서 2 인생을 아름답고 빛나게 시작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사랑에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ㄱㅇㅅ 08/0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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