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7년 12월 3일 목회 서신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2017 대강절 첫번째 주일, 저는 마지막 폐회 찬송으로 “내 평생에 가는 길”이라는 찬송가를 여러분과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가운데 함께 하실때, 우리 성도들이 누릴 있는 가장 은혜와 복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세상의 누구도, 무엇도 없는 평안을 땅에서 누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작사자인 ‘호례이쇼 G. 스패포드’에 얽힌 감동적인 간증을 정충영 교수님의 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을 작사한 호례이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카고의 유명한 변호사였고 시카고 의과 대학의 법리학 교수였습니다. 1873 평화롭고 행복하던 호례이쇼의 가정에 시련이 닥쳤습니다. 그는 병약한 아내의 휴양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출발하려고 여객선을 예약한 상태였지만, 시카고의 대화재로 자신의 집뿐만 아니라 그가 출석하던 무디교회도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스태포드는 무디교회의 재정을 맡고 있었으므로 교회당 재건 때문에 그의 부인과 명의 딸이 먼저 여행을 떠나고 자신은 며칠 뒤에 뒤따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대서양을 순항하던 여객선은 손님들이 모두 잠든 새벽 2시에 영국선적의 철갑선 ‘로키안’과 정면 충돌해 2 26명의 선객을 실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고 직후 스패포드 부인은 아이들을 이끌고 갑판 위로 달려 올라와 두려움 속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으나 여객선은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30분도 되는 동안의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스패포드 부인은 익사하기 직전 실신한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4명의 딸들은 모두 익사하고 맙니다. 9일후 스패포드 부인은 웨일스의 카디프에 도착하여 남편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혼자 구조됨’. 소식을 들은 스패포드는 아내를 데리러 서둘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가 배가 비극의 대서양 사고지점을 지나면서 그는 아픔과 슬픔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경에 그는 일찍이 체험해보지 못한 평안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그는 종이를 꺼내어 자신이 경험하는 마음의 평안을 기록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순탄하여 잔잔한 같든지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편하다. 영혼 평안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유명한 작곡가인 블리스에게 자신의 찬송시를 보여주며 작곡을 부탁하였고, 결국 이와 같은 아름다운 찬송가가 탄생하게 것입니다.

혹시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중에, 스패포드가 경험했던 극심한 풍랑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삶의 어려운 풍랑 가운데 지금 놓인 분들은 계십니까? 그래서, 하루 하루의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단해서, 어찌해야 할바를 모르고 오늘을 살아가시는 분들은 계십니까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날 있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편안하고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은 결코 누릴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날 있는 시간이 바로 지금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는 우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Comfort Zone 깨고 나아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결코 해결될 없는 인생의 풍파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만이, 오늘도 살아서 우리의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가까이 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의 -




2017년 11월 26일 목회 서신


2017 해가 이제 12 달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우리가 있습니다. 한자 고사 성어 중에 ‘광음여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이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빠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이미 느끼셨겠지만, 2017 해는 저에게도,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도 아마 ‘이미 쏘아서 다시 되돌릴 없는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사람도 예외 없이 동일한 24시간을 살아가고, 1 12달을 살아가는데, 이렇게 우리에게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2017 신년 초에, ‘전교인 40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2017 ‘크리스마스 예배’와 ‘송구영신 예배’를 앞두고 있습니다. 벌써 11달이 훌쩍 지나갔으니, 우리가 정신을 차려서 연말을 보람 있고 알차게 마무리하지 않으면, 흐르는 물처럼 순식간에 남은 달이 지나갈 같습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은 2017년을 아쉬움과 후회 없이 마무리 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2017 ‘크리스마스’를 달여 남겨둔 시점에서,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2017 Christmas Miracle Project”를 함께 하려고 합니다. 2016 크리스마스에 저희 교회는 성탄 헌금의 30% 따로 떼어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사랑의 헌금’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 자선 단체인 UMCOR 통해서, 아프리카 ‘케냐’와 ‘이디오피아’에서 가뭄으로 인해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없어 고생하는 아이들을 돕기 위한 선교 헌금($700) 보냈고, 나머지는 우리 교회가 위치한 지역 사회의 Homeless Shelter 지역 선교 단체($300) 보냈습니다함께 기도하며 동참해 주신 여러분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2017 ‘크리스마스’에는 시카고 남부에 있는 Englewood UMC 연합해서, 주변 지역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흑인 어린이들과 Homeless 돕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뭔가 특별하고 거대한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마음, 뜻이 되어서, 흑인 어린이들에게는 작은 크리스마스 선물(목도리와 장갑), 그리고 추운 겨울을 난방도 전기도 없이 지내야 하는 Homeless에게는 생필품(칫솔, 치약, 샴푸…) 들어 있는 ‘위생킷’을 전하려고 합니다. 요즘 경제가 너무 어려워서, 우리도 살아가기 힘든데,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서 혹시 의문을 가지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면 관계상 모든 것을 설명할 없지만, ‘임마누엘’의 징표로서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우리 모두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3: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는 영적 교훈을 남겼습니다. 바로 사랑을 우리의 입술뿐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2017 Christmas Miracle Project’를 준비한 것입니다. 이번 Advent 기간 동안 전해지는 말씀들을 통해서, 자세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Safe Zone 벗어나서, 하나님을 의지할 , ‘임마누엘’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기적을 깊이 깨달을 있게 됩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줄기 은혜의 빛이 되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그리스도의 -




2017년 11월 19일 목회 서신


시편 100편은 1620 12 26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 플리머스 해변에 첫발을 내디딘 146명의 청교도들이 해안가에서 소리로 외치던 감사시였습니다. 그들도 감사드릴 없는 상황 속에서, 행복을 가져오는 조건을 조금도 찾을 없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180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배를 타고, 평균 시속 2마일로 무려 117 동안 대서양을 횡단한 청교도들…. 항해중 사람이 죽었으나 작은 배속에서 생명이 태어남을 감사 드렸습니다.

 폭풍을 만나서 돛대가 부러졌지만, 배가 파선되지 않음에 그들은 감사 드렸고,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여자들이 번이나 바닷속으로 말려들어갔지만, 모두 무사히 구출됨에 감사 드렸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방해로 동안 배를 육지에 대지 못해 바다로 나가 상륙 지점을 찾아 헤매었지만, 고통스러운 3개월여의 항해 동안 한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이, 146 전원이 죽더라도 전진하자고 주장한 믿음과 용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던 입니다. 어떻게 기뻐할 없는 상황 속에서, 감사할 조건이 없는 환경속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있었습니까?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신 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이 117 동안 죽음을 담보로 하는 항해 속에서도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여주시고, 인도하여 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시간 정말 우리 마음과 생각에는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우리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감사의 조건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순간, 거룩하지 않은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 드릴 있음을, 하나님 앞에 나아올 있음을 감사 드립시다. 우리의 끝으로 여전히 호흡할 있음을 감사 드립시다. 오늘도 눈을 떠서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자녀들을 있음에 감사 드립시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가 있고, 들을 있고, 무언가를 먹을 있음에 감사 드립시다. 우리가 너무나 평범해서, 너무나 당연시해서 그동안 깨닫지 못한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서 지금 여기서 감사할 ,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감사의 조건들로 가득차게 것입니다. 끝으로 데살로니가전서 5:16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남겨준 영적 권면을 다시 한번 리마인드 해드리면서 오늘 감사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아멘!

 

-그리스도의 -




2017년 10월 29일 목회 서신


    어느덧 우리 중앙연합감리교회가 41주년 생일을 맞았습니다. 이제는 철부지 어린 시절의 티를 벗어버리고, 중년의 나이에 접어 들었고, 성숙한 사명을 감당해야 때가 우리에게 다가온 같습니다. 가장 먼저는, 지난 41년동안 우리 교회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에벤에셀의 은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었다면, 결코 오늘 자리에 중앙연합감리교회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모든 존귀와 영광은 온전히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그분만이 받으시는 것이 마땅할 밖에 없습니다. 또한 1976년부터 오늘까지, 지난 41 동안 우리 교회와 ‘희노애락’을 함께 오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고 헌신하신 여러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지금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 , 분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이 없었다면, 그리고 지금은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우리 교회를 섬겨 주셨던 믿음의 선배님들이 없으셨다면, 역시 우리 교회는 시카고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불혹’의 나이를 넘긴 중년 교회가 되었습니다. 공자의 말처럼, “마흔이 되어 남의 의견에 현혹되지 아니하는 불혹의 나이”에 우리 교회가 들어섰으니, 이제는 이상 “부질없이 엉뚱한 것에 마음을 뺏겨 갈팡질팡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찾고, 뜻을 이루기 위해서 대가를 치르며 노력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내용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가 더욱 거룩한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는 우리 사람, 사람이 더욱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의 문제”입니다.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세속적인 가치들과 우상들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우리 삶의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살전 5:16-18)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행복하고 좋은 일들이 많을 때는 누구나 하나님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있습니다. 물론 감사의 기도도 동반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기뻐할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감사할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하기를, 도저히 기도할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에게 원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연약한 인간이 그런 일들을 실천할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일들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와 사랑을 믿고, 오늘도 생각하고, 사랑 안에서 깨어 있는 자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신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기뻐할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쁨으로 봉사하고, 감사할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며 헌신하고, 도저히 기도할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도의 섬김을 보이는 삶을 살아갈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과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우리를 채워주실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중앙연합감리교회의 41주년 생일을 맞은 주인공들로서, 여러분들과 저는 다른 교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지도 말고, 다른 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말에 현혹되지도 말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명과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찾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더욱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는 없이 자꾸 나이만 먹는다고 한숨을 짓기 보다는, 오늘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떠십니까? 지난 41 동안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를 온전히 하나님께만 올려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




2017년 10월 15일 목회 서신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감리교회(Methodism) 역사 속에서, 평신도 사역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왔습니다. 미국 연합감리교의 초기 시대에, 평신도들은 순회 전도자(The Circuit Riders) 담당하였던 성만찬과 세례등의 전문 목회 사역을 제외하고, 실제적으로 개체 교회들을 섬기고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공문서에 따르면, ‘평신도 주일(a Laity Sunday)’은 1928년에 가장 먼저 계획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공식적인 의식은 1929 미국 남부의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서 시작된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 해인 1930년에는 The Evangelical Church에서 매년 평신도 남성 수련회(annual mens retreat)중에 평신도의 봉사를 기념하는 의식을 시작한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1 2 23일에 The Joint General Board of Lay Activities ‘평신도 주일’을 첫번째 미국연합감리교회의 공식 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런 이후에, ‘평신도 주일’은 1944년에 처음으로 ‘연합감리교회 장정(Book of Discipline)’에 공식적으로 언급되었고, 1964년에 발행된 ‘연합감리교회 장정’에서 10 2 주일(The second Sunday of October) 공식적인 ‘평신도 주일’로 지정하였습니다. 1972년에 제정된 ‘연합감리교회 장정’에서는 Laymens Day(평신도 남성들의 )”로 불리던 이름을 Laity Sunday(평신도 주일-남성과 여성들을 모두 포괄하는 명칭)”로 변경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매년 10 세째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섬기고 있습니다. 결국 평신도 주일(Laity Sunday) 교회 안과 (세상)에서 모든 평신도들이 행하는 섬김, 봉사, 선교의 사역들을 기념하고,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서 제정된 기념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평신도가 이끄는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교회 안과 밖에서,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섬김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 모든 평신도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 ‘전교인 바베큐 파티’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신도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수고해주신 모든 평신도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 , 분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구성하는 소중한 지체들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그리스도의




2017년 10월 8일 목회 서신


평생에 걸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5만번의 기도 응답 받은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 아무것도 가진 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 평생 기도의 무릎을 꿇었던 기도의 사람…..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드리던 사람 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기도의 동기는 항상 하나님 중심이었으며, 오로지 하나님 분만을 나타내고 높이기 위한 기도를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응답 받는 기도의 조건 중에서 특별히 가지를 강조하였는데, 번째는 기도의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성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함을 강조한 사람입니다. 번째는, 기도자의 기도 동기가 순수해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기도자가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쓰려고 하나님의 선물을 구하면은 안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 마음의 자세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평생 기도했던 사람이었기에, 조지 뮬러가 하나님이 주시는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선조들, 기적을 경험했던 믿음의 사람들, 우리보다 앞서 살다 사람들이 우리와 별반 다를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꾸 간과하며 살아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고 믿지만, 그것이 나의 삶을 통해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역사하실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무소 부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과거에 특별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만 기적과 표적을 보이셨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는 같은 일들을 하실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하실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적은 일어날 거라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심과 불신과 회의감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 삶과 신앙 생활 속에서 표적과 기적이 나타날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매일의 속에서 ‘단순한 영혼을 가진 그리스도인 들로서 성경 말씀을 읽으면, 말씀 그대로를 믿는 단순한 (Simple)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럴 , 우리가 믿는 믿음을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셨던 모든 기적의 시작은, 믿음의 기적과 은혜를 경험하기 원했던 사람들이 가진 믿음을 보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능히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9:28-29).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 믿음을 가질 ,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




2017년 9월 17일 목회 서신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구약 성경에 나온 ‘나실인’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나실인’이라고 하면, “아주 특별한 계시를 여호와로 부터 받아서 남들과는 다른 아주 특별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영적 지도자”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의 뇌리에 가장 먼저 스치는 대표적인 성경속 나실인들이 바로 ‘사사 삼손’과 ‘선지자 사무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민수기’에 보면, 성별의 구별 없이 “특별한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를 섬겼던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서, 하나님께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기 원했던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정 기간 동안을 자원하여서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헌신을 드리는 나실인의 자격”을 가질 있었습니다.

‘나실인’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나자르’는 ‘성별하다, 구별하다, 떠나다’라는 뜻의 동사 ‘나자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뜻이 “구별된 , 하나님께 드려진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헌신을 다짐하고 특정 기간 동안 절제의 서원을 자들을 말하는 단어인데, 성경에 보면 개인의 자의적인 선택으로 혹은 부모의 서원 기도 혹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택함”에 의해서 나실인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나실인으로 자신의 삶을 거룩히 구별하는 서원의 기도를 드린 사람들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가지 명령들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민수기 6:3-4절에 나온 것처럼,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고, 포도나무에서 생산된 모든 소산물들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포도주는 “향락과 방탕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포도나무에서 나는 모든 소산물들은 권위 있는 성경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풍요와 안정을 상징”하기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나실인들에게 금지된 품목이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나실인들은 “서원을 하고 구별한 날들 동안에는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아야만 했습니다. 쉽게 설명드리면, ‘삼손’처럼 자신이 서원한 동안에는 ‘머리털’을 깍지 말아야 했다는 입니다. 이유는 ‘나실인의 머리털’이 바로 ‘거룩함의 외적인 상징’이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자신의 머리 위에 하나님의 권능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실인들은 “거룩히 구별된 모든 기간동안 죽은 동식물들, 사체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시체로 인해서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표식인 머리가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죽음과 시체’는 바로 생명의 하나님이 타락한 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리신 저주의 형벌이었으므로, 거룩한 나실인들은 특별히 신경써서 시체, 죄를 멀리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나실인으로 자신의 삶을 거룩히 구별한 사람들은, 거룩함의 수준이 대제사장이었던 아론과 같은 높은 수준의 경건과 거룩함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히 구별된 나실인에게 거는 기대치가 높았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제가 오늘 ‘목회 서신’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나실인에 대한 기준과 사명’을 말씀드리겠습니까? 아마도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은 “나는 나실인도 아니고, 서원 기도를 적도 없고, 나랑 별로 상관없는 문제”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죄의 문제를 사함 받고, 타락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영적 나실인’으로 재창조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날은 구약 시대의 나실인과 같은 자격 조건과 기준을 충족시킬 필요는 없지만,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 ‘영적 나실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함의 기준과 기대치’를 갖고 계심을 알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거룩한 영적 나실인으로 구별’된 여러분들은 이제 하나님의 품과 사랑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없는 운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모두가 세상에 나가서, 우리를 타락시키려고 하는 악한 마귀와 죄와 맞서 싸우면서, 거룩한 영적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시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




2017년 9월 10일 목회 서신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다쉬’는 구약성서에 약 850회 사용 되었는데, “나누다,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입니다. 레위기 11:44절을 보면,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결국 성경에 나온 ‘거룩’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영적 자녀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성을 지켜서 우리 삶의 행실로 나태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 관점하에서, 성경에 사용된 ‘거룩’의 개념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나타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곧 “거룩”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현대 교회가,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함을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답과 아비후가 받았던 즉각적인 불의 심판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불순종과 불경건의 죄로 인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대속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그 값없는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거룩’은 여호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영원한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우리 믿음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필수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1:16절 이하에서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영적 권면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함을 받았지만, 아직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머지않은 그 날에 다시 우리에게 도적같이 임하시는 예수님의 심판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에게 ‘거룩’은 곧 ‘생명’입니다. 


-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7월 9일 목회 서신


샬롬!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늘 풍성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저와 여러분의 지나온 삶 가운데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드린 기도에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응답해주셔서, 깜짝 놀랐던 기적을 체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대한 그런 평범한 기도 응답들뿐만 아니라, 우리 상식과 계획을 벗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인해서 놀라운 믿음의 고백과 간증을 나누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이 일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터져나온 순간이 있으십니까? 만일 그러한 기도와 믿음의 간증을 드린 분들이 계시다면, 여러분들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시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그런 믿음의 고백과 체험이 한 번도 없으시다면, 저와 여러분은 가장 불쌍한 성도들 중에 한 사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경험해보지 못한 우물안 개구리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구하지도 않고, 담대하게 믿음의 발자국을 뛰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도 하나님이 써 내려가시는 중앙행전에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이름만 올리고 살아가는 불쌍한 신앙인들일지도 모릅니다.

반면, 수많은 기도 제목들을 끊임없이 간절하게 드렸는데도 지나온 나의 인생 동안 아무 응답도 받지 못했다면,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왜 응답이 없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성찰해 보아야만 합니다. 내가 드린 기도 제목들이 본질적으로 나의 욕심과 정욕에 의한 것들이라면, 아무리 구하여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런 욕심과 정욕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동기와 목적의 기도였다면, 단지 선하신 하나님이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며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인간이기에 성령 안에서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잠들어 있는 영혼, 육신의 사망의 법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그 말씀대로 실천해 가는 사람,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과 성령의 법을 따르는 신앙인’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우리가 ‘생명과 성령의 법’을 따르며 살 것인가, 아니면 ‘육신과 사망의 법’을 따르며 살 것인가는 누군가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 선택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세의 고통받는 이 때’에 왜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성령의 법’대신에 ‘육신의 사망의 법’을 따르며 살아갑니까? 자기 자신의 유익과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추구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을 따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거룩한 부담과 댓가’를 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일 아일드먼 목사님은 “누구나 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르는 ‘팬(Fan)’이 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A faithful follower of Jesus Christ)는 아무나 될 수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목사지만, 개인적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간절한 믿음의 소망과 기도 제목은, “저 자신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서 오늘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화된 성도”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제가 목회하고 있는 우리 중앙연합감리교회의 모든 교우님들이 저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로서 오늘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화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그것은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떼를 쓴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함께 ‘성령안에서 깨어서 기도’하고, 반드시 치루어야 할 ‘거룩한 부담과 댓가’를 치르며 살아갈 때, 이룰 수 있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는 연약한 죄인들이지만, 우리 연약한 죄인들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생명과 성령의 법’을 지키며 살다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우리 삶을 통해서 그 놀라운 기적들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와 우리 가정은 이미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삶”을 택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같이 그 ‘거룩한 믿음의 삶’에 동참해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선택은 우리 앞에 놓여 있고, 그 선택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도 우리 각자가 짊어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가장 최선의 지혜로운 선택을 내리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종-




2017년 7월 2일 목회 서신



샬롬!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늘 풍성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기도’에 관해서 잠시 묵상해 보겠습니다.

“훌륭한 청교도 설교자이자 위대한 지도자 조셉 파커는 금혼식때, 그의 삶이 그토록 감동적이고 많은 이에게 깊은 영향력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게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대학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께서 저를 부르셔서 한 가지 약속을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내용을 알아야 약속을 하지요?”라고 묻자, 어머니는 “어렵지 않다. 결심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네가 그렇게 한다고 약속하면 얘기하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한참을 생각하다 결심하고 말씀하시라고 했습니다. “나는 너를 지금까지 기도하면서 길렀다. 이제 집을 떠나니 한 가지만 부탁한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쳐 다오.” 집을 떠난 그날부터 어머니와 한 이 약속이 제 삶을 지배했습니다. 기도 없이 살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 때마다 어머니 음성은 하나님 음성이 되어 제 마음속에 역사했습니다. 저는 날마다 무릎 꿇었고, 오늘까지 기도로 살아왔습니다. 기도가 있었기에 수많은 설교와 사역이 가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영적 교훈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좋아하고, 심지어 우리의 머리 속에 암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늘날 찾아보기가 더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름 동안에는 저를 비롯해서, 우리 교회 많은 교우님들이 휴가를 다녀오시거나, Family Union(가족 모임)을 가지시며 보내십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그 소중한 시간들을 여러분 소홀히 하지 마시고, 좋은 추억과 아름다운 기억들을 많이 남기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동시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반드시 1 365일 거룩한 주님의 성전에 나와서 기도해야만 한다고 하면,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이 말씀을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호흡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잠시라도 기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성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만을 가르키는 것은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영적 권면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곧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요?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깐의 여유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매일의 삶은 “쉬지 않는 기도”로 가득차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올 한해동안, 우리 교회의 표어처럼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2017년 6월 25일 목회 서신


샬롬!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늘 풍성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어쩌면 우리 뇌리 속에서 잊혀진지 오래일지 모르지만, 우리 한국인들이 쉽게 잊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국가 기념일입니다. 바쁘게 살다 보면, 더욱이 미국 땅에서 이민자로 살다 보니 우리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진 감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오늘은 한국 전쟁(6. 25전쟁)이 발발한지 6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미국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다가 City Town 건물 벽 한쪽에 크게 쓰여진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벽에 쓰여진 글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제 머리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데, 그 글은 “Freedom is not Free”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아마도 우리 교우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그 참혹한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시면서, 많은 어르신들이 더 많은 걱정과 염려에 휩싸이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피흘림이 있었기에, 오늘날 모든 한국인들이 ‘자유’를 누리게 되었는데, 우리 모두는 그 값진 희생과 헌신을 쉽게 잊어버리고, 당연히 우리가 오늘도 누려야만 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젊은 세대나 미국의 젊은 세대나 별반 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계 제 1, 2차 대전을 참전하고, 한국 전쟁을 참전하고, 베트남 전쟁을 참전한 미국의 노병들(Veterans)도 미국의 젊은 세대들에 대한 걱정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꽁짜”로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전쟁에 나가서 피흘리고, 희생한 이름없는 군인들로 인해서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아무런 부담없이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면서도 그 소중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속에, 이미 한국 전쟁은 잊혀져 버렸거나, 혹은 어린 시절의 힘들고 아련했던 추억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전쟁을 경험해 보신 여러분들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에 더욱 격하게 공감하실 것입니다. 이미 전쟁을 경험해 보셨고, 자유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으셨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그들이 듣던지, 듣지 않던지 상관없이 오늘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한국 전쟁에 대한 영화를 함께 보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이야기 해주시든지, 아니면 ‘한국 참전 용사 기념비’나 ‘박물관’을 함께 여행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분명한 안보의식과 자유의 소중함, 그리고 나라의 소중함을 교육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젊은 세대를 바라보며 걱정하고, 한숨만 내쉴 것이 아니라,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나라 사랑의 마음’과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을 오늘부터라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이 자신의 선민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이 탁월한 민족이 된 이유는, 그들의 조상들이, 그들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토라(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그 신앙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후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한국 국민들은, 저와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자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민족 정체성’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고, 유산으로 남겨주고 있습니까? 미국에 살고 있기에, 그런 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적 선민들로서,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으로 계승하고 있습니까?

민족의 지도자나 정치인들이 우리 후손들을 변화시키고, 소망이 넘치는 다음 세대의 일꾼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우리 자신들이 가진 믿음의 유산과 전쟁의 경험을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었을 때, 지금 우리 세대보다 더 나은 다음 세대가 우리 가정과 교회,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키는 주인공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이런 저런 질책과 비난의 말들 보다는, 우리 자신들이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믿음의 본을 보이며 살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2017년 6월 18일 목회 서신



샬롬! 우리가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날 그 날 기분과 날씨와 삶의 조건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는 감정을 가진 인간들과 달리, 언제나 변함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둔 자녀들이 산을 옮기는 기적, 홍해를 가르는 기적, 우리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살지 못하고, 능력도 행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예수님이 12명의 사람들을 제자 삼으시고 파송하시면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었던 그 권세와 능력”(10:8)을 오늘날 행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명령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담대히 악한 마귀들에게 선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보다는 우리가 처한 환경과 조건과 상황에 파묻혀 살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최선의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라고 믿어서, 악한 마귀들의 공격에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고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으로는 믿지 못해서, 아무런 믿음의 행동도 취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는 마크 배터슨 목사의 말처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자녀답게 사랑하고, 자녀답게 베풀고, 자녀답게 섬기고, 자녀답게 기도해야 하는 마음가짐과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 모두, 사도 바울이 준 에베소서 6:11(“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의 영적 교훈의 말씀을 모르시는 분들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한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그리고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글 성경 번역본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시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라”는 역어순으로 기록되어 있고, 영어 번역 성경도 그러한 역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차이를 느끼십니까? 우리의 영혼이 죽고 사는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르는데 있어서,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이 말의 어순이 왜 중요합니까?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한때 수비가 강한 팀, 방어를 잘하는 팀이 월드컵과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비를 잘해도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공격을 해서, 골을 넣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어서 전신 갑주를 입으면, 마귀가 어떤 치밀한 음모를 계획해서 우리에게 영적 전쟁을 걸어와도 우리는 당당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인생의 어려운 문제와 고난을 당하고 나서, 그때서야 정신차리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맞서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면서 영적 전투에 임하지 말고, 먼저 능동적으로 영적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맨날 얻어터져서 피흘리고, 회복 불가능의 마음의 상처를 입은 후에야 정신차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찾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할 때도 미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악한 마귀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니, 믿음으로 선포하고, 평안할 때도 기도하면서 영적 무장을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담대히 믿음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서 악한 마귀들에게 공격을 퍼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권능이 우리 안에 있는데, 그분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는 왜 날마다 수동적으로, 우리가 처한 환경과 조건과 상황에 치이고, 악한 마귀 사탄에게 치이면서 늘 무기력하게 살아야만 합니까?왜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안에 있는 ‘바로 왕’을 어쩌지 못해서, 두 손들고 하나님께 나아와야만 합니까?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은 우리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대신 전쟁에서 싸워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하며, 그분의 말씀으로 무장된 전신 갑주를 입을 때만, 우리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공격을 악한 마귀들에게 퍼부을 수 있고, 어떤 계략과 음모들도 박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강한 믿음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






2017년 6월 4일 목회 서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성경 66권 속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끊임없이 반복된 하나님의 명령, 즉 계명이 무엇일까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었을까요? 의심할 바 없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셨던 가장 큰 계명중에 하나이고, 우리들이 반드시 지켜 행하여야 하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성경속에서 그것이 가장 많이 반복된 하나님의 명령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겸손’은 어떨까요? 물론 겸손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가장 아름다운 성품이셨지만, 그것도 정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순결, 정직, 성실, 전도, 영적 싸움’일까요? 아니면 ‘깨어서 기도하는 것’? 물론, 그러한 덕목들도 기독교인들에게는 모두 너무나도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 또한 성경안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서 사용된 명령들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경속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무려 성경안에서 365회나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매일의 일상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경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단어를 가장 많이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사용하셨을까요?” 두려움이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크고 무서운 고난이기 때문일까요? “네” 맞습니다. 두려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에 앞서서 절망의 깊은 골짜기로 우리를 떨어뜨리는 가장 치명적이고 부정적인 삶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과 어려운 삶의 문제들을 만났을 때,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극심한 두려움을 직면하는 그 순간에, 의지가 약한 어떤 사람들은 절망에 쉽게 빠져들거나, 혹은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근심과 염려,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두려움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열정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두려움의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와 새로운 영적 갱신의 축복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까닭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 ‘내일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에 갇혀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불안한 미래만큼 우리 삶에 두려움과 염려를 가져다 주는 강력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연약한 우리 인생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서, 그리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을 기억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때, 보혜사 성령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을 붙들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종-




2017년 5월 28일 목회 서신



오늘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4:2절에 남긴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언급한 실천적 권면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 땅에서의 순례 여정을 걸어가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기도 생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절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라’고 명령한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레이테’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는 ‘동안’이란 뜻을 가진 전치사 ‘프로스’와 ‘참다, 견디어내다’라는 뜻의 동사 ‘카르테레오’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그 뜻은 “확고부동하게 지속하다, 변함없이 헌신하고 충성하다, 애착을 가지다, 전념하다”라는 다양한 뜻을 가집니다. 결국 ‘기도를 항상 힘쓰고’라는 단어의 뜻은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중도에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여 포기하거나 회의에 빠져 그만두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일관되게 지속해 나가라”라는 의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어구의 뒤를 이어서,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한 것이 바로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영적 권면입니다. 왜 ‘기도’와 ‘감사’는 성도들과 분리할 수 없는 영적 덕목들이 됩니까? 감사가 선행된 기도가 바로 우리 믿음의 확신을 증명하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간구 기도에 하나님이 지금 응답해 주실지, 아니면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그것도 아니면 영원히 침묵하실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왜 오늘도 기도를 드립니까? 선하신 하나님이 비록 우리가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기에 우리는 미리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에 감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감사가 선행될 때, 우리는 이미 나와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절의 마지막에 사도 바울은 ‘깨어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깨어 있으라’라고 번역된 헬라어 ‘그레고룬테스’는 “주의를 집중하여 조심하며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그레고류오’의 현재 명령 분사로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일상 생활에서 깨어 있으라는 단독 명령이 아니라 항상 힘쓰는 기도에 깨어 있으라는 명령”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에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합니까?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 우리의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는 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그분의 보이지 않는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 내가 믿음의 성도로서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기도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흔히 말합니다. 내가 다른 누구와 온전한 대화를 나누기 원한다면,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해서는 안되고, 그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만을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말한다면, 우리는 결코 상대방과 온전한 대화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항상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기도에 깨어 있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믿음의 관계는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관계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겸손한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늘 감사함으로 깨어서 기도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2017년 5월 21일 목회 서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주신 믿음의 지침서입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성경은, 처음서부터 끝까지 죄인된 인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거룩하고 조건 없는 사랑’에 관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관한 내용들과 하나님의 율법들을 배우다 보면, 곳곳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감동하여서, ‘미친 기도’와 ‘미친 믿음의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미친 기도’와 ‘미친 믿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다니엘이라는 성경 인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다리오 왕때에 다니엘을 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30일간의 금령이 바로,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법”이었습니다. 그 간신들의 사탕발림에 속은 다리오 왕은 금령에 왕의 도장을 찍어서 전국에 공포합니다. 다니엘서6:10절에 보시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미친 믿음’이 아닙니까? 정신이 나간 ‘미친 기도’가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조용히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며30일간만 자신의 믿음과 기도 생활을 숨기고 있으면 됩니다. 비록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명을 더 우선시했다는 죄책감과 양심의 찔림은 잠깐 동안 있겠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살아남아야 기도도 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무엇인가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미친 믿음’과 ‘미친 기도’를 드리는 다니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과 비교해본다고 해도, 달라도 너무 다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이 코 앞에 있고, 사자들의 밥이 될 것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까지 버젓이 열어젖히고, 평소처럼 기도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상식으로 볼때는 얼마나 어리석고, 미친 사람입니까?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런 ‘미친 믿음’과 ‘미친 기도’를 가진 다니엘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영광을 온 메대 땅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니엘은 이렇게 미친 기도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의지와 생명이 깃드는 장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충만함의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만이, 즉 하나님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만이 ‘미친 믿음’과 ‘미친 기도’를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우리는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성령의 충만함속에서 미친 믿음을 가지고 미친 기도를 드리고, 믿음의 미친 행동들을 실천하면, 미친 기적들을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들이 소유한 믿음의 그릇을 얼마나 크고 넓은 것으로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기적과 은혜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4장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성공 지상주의, 물질 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도 남들이 하는 만큼만 사랑하고, 남들이 하는 만큼만 기도하고, 남들이 가진 믿음만큼만 순종하는 삶의 범주를 뛰어넘어서, ‘미친 사랑, 미친 기도, 미친 믿음’ 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을 살아 가시면서, 얼마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미쳐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일에 미친 그리스도인들과 신앙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2017년 5월 7일 목회 서신




     ‘샬롬’의 은혜와 은총이 여러분들의 삶에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목회 서신은 ‘선한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전화로 주일에 할 설교 제목과 성경 본문을 비서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 본문은 시편 23:1-6절이고, 설교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입니다. 그러자 비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게 전부입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뭐가 더 필요해?’라고 말했고, 비서는 ‘알겠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주보를 받아 든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설교 제목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뭐가 더 필요해?’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가만히 보니 그 제목이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비서를 통해 하나님이 설교 제목을 주신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뭐가 더 필요해?’라는 부분에 맞춰 설교를 고치시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자시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이미 엄청난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묵상이 물밀듯이 몰려오면서 목사님 자신이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양입니다. 목사인 제가 중앙연합감리교회의 선한 목자가 아니라, 우리 교회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 중에 한 분이 우리 교회의 선한 목자가 아니라,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앙연합감리교회의 유일한 선한목자이십니다. 단지 저와 여러분은 다 양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양은 어떠한 공격용, 방어용 무기도 가지지 않는, 즉 날카로운 발톱이나 뿔도, 이빨도 없는 온순한 초식 동물입니다. 시력도 좋지 않아서 늘 우두머리 양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고, 꼭 무리를 지어서 다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온순해 보이는 양은 대단히 이기적인 동물이어서 공동체 생활을 할 줄 모르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이기적인 양들은 제멋대로 무리에서 이탈하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들짐승들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양에게 목자의 존재는 절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라고 해서 모두가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사랑하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보살피고, 지켜주고, 푸른 풀밭과 맑은 물가로 인도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목자들 중에는 삯꾼 목자들도 많고,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거짓 목자들도 많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땅의 모든 양들을 위한 유일한 선한목자가 되십니다. 그 선한목자되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동행하여 주시면서, 우리를 푸른 풀밭, 맑은 물가로 인도해주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은 그 선한목자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뭐가 더 필요합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영원한 평화와 기쁨과 안식이 있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오늘도 선한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양 무리가 되십시오. 


-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4월 30일 목회 서신



샬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디베랴 호숫가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 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밤새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서 조반을 차려 주시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밤에, 수제자 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왜 베드로가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으로 잡혀갈 때,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지 않고, 그 뒤를 따라 갔는지 그 이유는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뒤를 쫓아갔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예언대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누가복음 22:61-62에서 살펴보면,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바로 직후에, 주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고,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친 이후에 베드로가 심히 통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본문에 대하여, 어떤 목사님이 강해 설교를 하셨는데, 아마도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신 눈빛은 수제자의 배신에 대한 원망과 원한의 차가운 눈빛이 아니라, 너무나도 약한 인간이기에 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나약한 제자를 향한 따뜻한 사랑과 용서의 눈빛이었을 것이라고 추측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베드로가 그 용서와 사랑의 눈빛을 보고 나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 으로는, 이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만약 주님이 베드로를 원망 가득한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면, 베드로는 결코 밖에 나가서 통곡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두려움을 가졌거나, 그냥 그 시선을 무시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너무나도 따뜻한 사랑과 용서의 눈빛을 보았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것에 대한 심한 자책감과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후에, 그러한 회개의 체험은 베드로에게 너무나도 큰 내면의 아픔이 되었고, 비겁하고 비열한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 자괴감으로 표출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자기 일상의 자리로 돌아온 베드로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어쩌면 심한 좌절과 상실감에 빠져 있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실패한 인생을 살 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셨고, 위로하셨으며,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회복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평생 죄책감과 실망감에 살아갈 수 밖에 없던 베드로를 만나주신 부활 하신 주님, 그 만남만으로도 베드로는 인생의 큰 짐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베드로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함 받고, 자신이 가진 마음의 짐을 덜어버리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나가는 사도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베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 훌륭한 사도 중에 한 사람이 됩니다. 부활의 삶은 예수님을 지적으로 안다고 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증인은 예수님이 베풀어 주시는 기적과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사랑과 사명을 깨닫고, 그 주신 사명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부르심에,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 하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우리 자신들이 가진 대답과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4월 16일 목회 서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우리 삶 가운데 살아계셔서 함께 해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라 바닷가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을 보시면, 그 디베랴 바다(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은 153마리의 물고기를 제자들이 잡도록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밤새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서,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따끔한 충고와 채찍질보다는, 사랑과 격려인 것 같습니다. 밤새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수고하고 지친 그 제자들에게 주님은 사랑의 마음과 위로가 담긴 따뜻한 일용할 양식들을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요한복음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베드로를 사랑으로 회복시키셔서, 그가 진실한 주님의 일꾼으로 거듭나도록 사명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을 통해서, 주님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아픔들을 치료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셨고,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것도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을까요? 만일 여러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동일한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을 받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도 동일하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사랑과 사명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 없이는 주님의 양을 돌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재미있는 특징을 가진 존재입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지 않으면, 더 죄악속으로 빠져들고, 더 편한 삶을 추구하려고 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의 생령을 불어 넣어서 생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악한 본성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연약한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잘 아셨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을 통해서, 입술로만 고백하는 이성적인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가장 중심에서부터 나오는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 고백할 수 있는 사랑의 고백을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고백이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고백,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인생의 목적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사랑이라는 것은 입술의 고백, 이성적인 뇌의 판단으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인간의 사랑에도 진실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감성적인 사랑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 감성적인 사랑을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행함입니다. 행함은 사랑을 완성되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까닭은 그 사랑의 고백이 이성적인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이성을 함께 동반하는 진실한 고백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수 많은 죽음의 고통과 외로움과 모욕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이성과 감성을 통해 이루신 완전한 사랑,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사랑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삶의 자리에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들을 깨닫고, 그 사명에 순종하며, 부활의 기쁨과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4월 9일 목회 서신


    샬롬! 오늘은 십자가 수난의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이번 한 주간을 우리는 고난 주간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고난과 아픔, 수치와 죽음의 고통을 묵상한다는 점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절기들 중의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향하여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12:13) 라고 외치던 바로 그 유대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길 원했던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했던 예수님, 그 분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물과 피를 다 쏟음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어떤 값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과 채찍질로 인해서, 온 몸의 살이 터지고, 못박힘으로 인해서 뼈가 갈라지고, 창에 찔림으로 인해서 온 몸의 물과 피를 쏟으셨던 그 예수님, 그 분이 주신 값없는 은혜와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 십자가 대속의 은혜 때문에, 오늘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대속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24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그 말 그대로 예수님을 쫓는 제자들이라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닮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도 우리에게는 결코 쉽지 않는 일입니다. 왜 쉽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 몸에 있는 모든 물과 피를 흘리는 완전한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물과 피를 완전히 흘려서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 마치 생명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물과 피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뜻대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둘은 결혼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에서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 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그러나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그들의 사랑이 어느 날 깨지고 말았습니다. 소와 사자는 심하게 다투었고, 끝내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난 최선을 다했어” 라고 말입니다. 

    온 몸의 물과 피를 흘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 앞에, 여러분들은 오늘의 삶 속에서 무엇으로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까?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하루, 은혜의 하루에, 내가 원하는 최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선의 삶을 사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4월 2일 목회 서신


     우리 주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의지와 생명이 깃드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언행이 달라지고, 우리 삶의 방향과 모습이 달라집니다. 악하고 죄악된 생각이 우리 마음에 자리잡으면 우리는 죄인의 길로 나아가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거룩하고 선한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면, 우리는 선한 생각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도구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와 생명이 깃드는 마음과 생각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중요성을 인식한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강조했고, 로마서 8: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모든 육적이고 악하고 죄악된 생각들을 사로잡아서 밖으로 몰아내야만 하고, 선하고 거룩하고 창조적인 생각들을 우리의 마음속에 잘 간직하면서, 꿈꾸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6:26~28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생각과 마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붙드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요즘 계절적으로 환절기를 맞이해서, 기온과 날씨가 오르락 내리락 한 여파로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계시는 교우님들이 많으십니다. 또한 우리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업의 어려움과 다른 인생의 문제들로 인해서, 웃는 날보다는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날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며, 인내하는 훈련이 필요한 때가 이 사순절 기간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참 생명과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길고 고통스러운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셔야만 했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시면서, 예수님이라고 왜 갈등과 고민과 괴로움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끝까지 인내하시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끝까지 인내하며, 묵묵히 순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영광과 소망은 우리가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는 기도와 믿음의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사도 바울이 로마서 5:3~4절에 남긴 영적 교훈을 묵상하며, 인내의 지혜를 배우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3월 26일 목회서신



   샬롬!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욥기 12장에 나온 욥과 그의 친구 소발의 대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욥기 12:8절(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을 보시면 자신을 어리석은 들나귀 새끼에 비유하며 모욕적인 말을 한 친구 소발에 대한 의인 욥의 변론이 나와 있습니다. 소발은 자신의 친구 욥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기 때문에,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 하나님이 주신 징벌을 받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인생의 큰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는 친구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가, 차라리 입을 다물고 조용히 옆에 있어주면서, 그와 그의 가정을 위해서 위로의 말과 기도를 해주면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은 뭐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인지, 자신이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친구 욥을 더욱 괴롭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인생의 큰 어려움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너무나도 쉽게 “잘못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고….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고…. 아무래도 저런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정신차려서 기도 하라고… 지금에야말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소발도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정작 우리 자신들이 똑같은 고난과 믿음의 시험을 당하면 별반 다르게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욥의 친구 소발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그런, 소발의 인과응보론과 현세적 보응 사상을 비꼬면서, 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 가운데 모든 짐승과 새, 땅과 물고기마저도 친구 소발이 하는 그런 하찮은 비유나 영적 가르침들을 알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기 때문에, 소발과 다른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의인 욥이 받는 고난은 그의 친구 세 사람이 변증하고 있는 것처럼, 욥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기 때문에 인과응보적으로 받는 형벌의 댓가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짐승이나 새, 땅과 물고기도 가르쳐주고, 설명해줄 수 있는 그런 얄팍한 지식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믿음과 삶의 위기를 경험할 때마다, 어떤 믿음의 반응을 보이십니까? 우리는 당면한 문제와 위기에 초점을 맞추십니까?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십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가 하나님보다 큽니까?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문제보다 큽니까? 우리 인간의 지혜와 상식과 능력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절대 지혜와 능력, 오묘하신 섭리를 우리는 입으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 입술로 하는 고백이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도 믿어지십니까? 그래서, 대담한 기도와 함께 대담한 믿음의 행동도 수반되는 삶을 살아가십니까? 거친 파도를 잠잠케 하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믿었다면, 왜 사도 베드로를 뺀 다른 11명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탄 배를 나와서, 갈릴리 바다를 걷기 위한 믿음의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을까요? 수제자로서 다른 제자들보다 그나마 더 나은 믿음을 가졌던 사도 베드로는 왜 갈릴리의 거친 풍랑을 잠시 걷는 것 같더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우리 삶에 거칠게 몰아닥치는 험한 바람과 파도를 예수님처럼 잠잠케 해 달라는 초자연적인 기도의 능력을 간구하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가 이 거친 풍랑속에서도 제발 건너편까지 안전하게 도착만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니까? 그게 아니면, 이 인생의 풍랑속에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고난과 시련속에서 내뱉는 말과 반응하는 행동에 우리 자신들이 가진 믿음의 수준과 기도의 수준이 달려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뜬 구름잡는 믿음과 기도의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 기도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리스도의종-



2017년 3월 19일 목회서신



   샬롬! 우리 주님이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것처럼,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이고, “며칠을 굶주리면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지 않습니까?” 며칠을 굶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밥이 찬 밥이든 아니든, 반찬이 많든 적든간에 이것 저것 가릴 것이 있겠습니까?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눈에 보이는 대로 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며칠 동안 사막을 헤매며 갈증으로 인해서 죽기 직전에 있는 사람이라면, 평소에 처다도 보지 않던 아무리 더러운 흙탕물일지라도 살기 위해서라도 정신 없이 마시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누가 하나님 앞에 목숨 걸고 매달려 간절히 기도합니까? 누가 하나님 앞에 대담한 기도를 드립니까?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돈도 충분히 있어서 먹고 살 걱정 없고, 가족도 건강하고 자신도 건강해서 아무 문제 없고,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도 별반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눈물로 기도합니까? 그처럼 부족한 것 없이,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놀라운 기적을 이루어 달라고, 대담한 간청의 기도를 드립니까? 왜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건강 문제나 가정의 문제, 사업과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합니까? 왜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과 인생의 거대한 장벽들을 마주하면 함께 모여서 한 마음으로 기도합니까?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가 가진 상식과 지혜로는 그 당면한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으니,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경험한 성령의 역사와 기적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놀라운 초대 교회의 영적 부흥과 성장의 배경 뒤에는 그들이 당한 ‘박해’가 한 가지 원인이었습니다. 헤롯왕과 제사장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잡아가두고,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정들었던 예루살렘을 떠나서 이스라엘 각 지역으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서, 안전한 이방 도시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고, 그 핍박으로 인해서 가슴 아파 하며,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였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도하고, 헌신하는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모른척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 무서운 박해속에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바대로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 충만의 은혜와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들이 가진 건강의 문제로 인해서, 우리의 가정과 사업이 어려움 가운데 놓여서 힘들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할 때입니다. 어려울수록 우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우리 자신들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올 해 우리 교회의 표어처럼,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교회”가 될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3월 12일 목회 서신


     샬롬! 우리 주님이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오 신실하신 주’ 라는 복음성가를 알고 계십니까? ‘찬미예수’ 악보 시리즈를 직접 손으로 그려서 발간한 한국의 최용덕 간사님이 만드신 찬양곡인데, 히브리서 13:5절 말씀(“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을 묵상하시면서 작사하신 곡입니다. 그 곡의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최용덕 간사님의 믿음의 고백이 담긴 은혜로운 복음성가입니다. 이 가사처럼, 저와 여러분은 오늘도 돈이 지배하고 있는 이 물질만능주의 세상속에서 신실하신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고, 임마누엘의 은총 가운데 우리를 지켜주시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의지하며 오늘을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어떤 순간과 처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주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신실한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간구에 하나님이 아무 응답을 하시지 않을지라도,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늘 그분만을 찬양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눈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복음의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진리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오늘부터라도 이 영적으로 거듭난 눈과 귀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3월 5일 목회서신


샬롬!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혜의 왕인 솔로몬은 잠언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16: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 인생의 절대 주권자 되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영적 권면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계획할지라도’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예핫쉐브’의 원형 ‘하솨브’는 본래 ‘엮다’란 의미를 지니며 이에서 파생된 뜻이 “꾀하다, 생각하다, 고려하다, 계산하다, 상상하다, 의도하다”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에 사용된 ‘자기의 길을 계획한다’라는 뜻은 “사람이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 세세히 그 과정과 결과 등을 스스로 계산하고 치밀하게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에, 그 소중한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는 치밀하게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모든 일에 노력하며 사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우리가 마음먹은 것처럼, 치밀하게 계획한 것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에 인생의 아이러니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 나온 하반절 말씀을 통해서 지혜의 왕 솔로몬이 우리에게 남겨준 영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가 아무리 치밀하고 완벽한 인생 계획을 세웠을지라도, 진정한 의의 길, 생명의 길로 나아가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복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을 걸어가는 길과 걸음이 우리 걷는 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성공의 기회는 오직 나 자신만이 깨닫고 붙잡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짝 정신을 차리고, 기도 가운데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그 소중한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매일의 삶 속에서 “성경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수요일부터 시작된 사순절(LENT) 기간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영적 성장의 기회를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 자신들을 영적 광야로 내몰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는 그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와 영적 각성의 시간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길을 열어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광야로 나가는 훈련을 해야 하고, 그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십니까? 이미 시작된 사순절을 통해서, 광야로 나가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기회를 붙들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미 마귀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2월 26일 목회 서신

샬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은혜가 여러분의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잠시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고넬료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삼은 사도행전 10 2절에는 고넬료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는 짧은 문장 말고는, 그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였는지, 그가 어떻게 기도하고,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있는 가지 단서들은 그가 “항상 기도”하였고, “자신의 삶과 일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속에서도” 기도했음을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했고,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있는 단서가 사도행전 10장에 나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본문 2절을 보면,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경외하며’로 번역된 헬라어 ‘포부메노스’는 “두려워하다, 존경하다”를 의미하는 ‘포베오마이’의 현재 분사형으로서,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경외하는 고넬료가 과연 무엇을 하나님 앞에 구했겠습니까? 자기가 얻기를 바라고 이루기를 원하는 것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도 제목들을 하나님 앞에 일방적으로 간구하였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결코 그런 일방적인 간구의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각에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묻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바대로 살기 위해서 기도했을 입니다. 그것의 명확한 다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행전 10:33절에 나와 있습니다. 자신의 집을 방문한 사도 베드로에게 고넬료가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는 군대 백부장으로서 사도 베드로보다 높은 지위, 많은 재물을 가진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는 유대 백성을 베드로보다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준 환상과 계시까지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깨닫지 못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는 충분히 교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 베드로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할 있었던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했던 입니다. 다시 말하면“고넬료는, 당신 스스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스스로 자기 기도에 응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하여져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성령님이 일을 대신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넬료는 오히려 항상 겸허하게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초점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과 기회가 그에게 찾아올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그러한 기도의 자세, 믿음의 자세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원하시고 계십니다. 기도는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마음과 생각과 삶을 채우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냐고요? 그것은 우리 사람, 사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기도)속에서 반드시 찾아야만 숙제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숙제를 마치고, 칭찬받는 충성된 자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그리스도의 -



2017년 2월 19일 목회서신


샬롬! 지난 한 주간도 주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평안하셨습니까? 지난 금요일 새벽에 2017년 전교인40일 특별 새벽 기도회가 많은 은혜와 아쉬움속에서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신년 초서부터 시작된 특별 새벽 기도회라서, 겨울 날씨와 여러가지 변수들이 많아서 많은 걱정과 염려를 하였지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많은 아쉬움과 은혜를 남기며 우리 모두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성황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목회 서신을 통해서 참여자들과 함께 배웠던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누기를 원합니다. 2017년 전교인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를 위해서, 우리는 마크 배터슨 목사님이 쓰신 ‘기도의 원 그리기’라는 책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의 글이 나옵니다. 

“기도는 인간적 만남과 하나님이 주도한 만남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기도는 훌륭한 아이디어와 하나님이 주신 아이디어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기도는 어쩌다 걸린 행운과 하나님의 은혜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기도는 닫힌 문과 열린 문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기도는 가능과 불가능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지금 여러분들이 두 손을 모으고 드리는 기도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도인지를 확인하기 원하신다면, 제가 드리는 몇 가지 질문들을 깊이 한번 묵상하며 스스로 대답을 해보셔야 합니다. 

첫째,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이, 우리가 지금 드리는 기도가 정말로 우리 자신들의 욕심과 자기 중심적인 기도 제목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도 제목들임을 여러분들은 확신 하십니까?” 둘째,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경험 하십니까?” 셋째,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내면과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진정으로 순종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넷째,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이라도 우리가 드리는 모든 간구와 기도 제목들(매일의 양식, 물질, 건강, 축복…)을 내려놓고, 오직 그분의 말씀만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실 수 있으십니까?” 다섯째, “우리 마음의 중심과 삶의 중심을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우며 살아가실 수 있으십니까?” 여섯째,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우리 삶의 우선순위와 계획들을 기꺼이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으십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여섯 가지 질문들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Yes”라고 대답을 하실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여러분들이 드리는 모든 간구 기도에 전능하신 하나님은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위에 질문들 중에서 두 개 이상의 답이 “No”라면, 우리는 올바른 기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태도와 방향성을 다시 한번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결코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대화” 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호흡”입니다. 우리 육신이 호흡을 하지 않고, 단 5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기도가 끊긴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또한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바로 우리 영적 삶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오늘도 “쉬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하고, 올바른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도 그런 필수조건들을 만족시키며 살아가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성도들” 입니까? 그 대답은 아마도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2월 12일 목회서신


     샬롬! 한 주간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우리가 잠시 ‘중보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시면,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족속과 전투를 벌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영적 지도자인 아론과 훌과 함께 그 전쟁터가 보이는 근처의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이미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높은 산 위로 올라간 모세는 그곳에서 전쟁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모세의 두팔이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이겼고, 반대로 모세의 팔이 피곤해서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지는 기이한 전쟁 상황이 펼쳐집니다. 자신의 민족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적군이 아말렉 병사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때까지 두 팔을 들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도 우리와 똑같은 육신과 피를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루 종일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두 팔을 들어올려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힘이 빠져 피곤한 모세를 위해서,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게 하고, 양쪽에서 팔을 들어주어 그 전쟁을 이스라엘의 승리로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 17장에 소개되어있는 영적 전쟁의 법칙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영적 전쟁의 원리를 우리 기도 생활에 접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악한 마귀 사탄과 싸우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중보기도자’들이 필요합니다. 모세가 피곤할때 그의 두 팔을 붙들어준 아론과 훌처럼,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중보기도자들(아론과 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강한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일찌라도, 늘 변함없이 한결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연약한 인간인 이상, 우리 믿음도, 우리 힘도, 우리의 결연한 의지와 결단도, 우리가 드리는 간절한 기도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약해지고, 지치고, 흔들립니다. 그래서, 그럴 때 우리의 두 팔을 함께 들어줄 중보기도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그네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외로울때 서로에게 힘과 위로를 줄 수 있는 동역자들과, 지쳐서 쓰러질 때 그 넘어진 손을 잡아서 일으켜주며 격려해주는 중보기도자들의 기도입니다. 중보기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도 자신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기 전날밤, 사랑하는 제자 3명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따로 올라가셨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중보 기도를 부탁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그러하실진대, 하물며 우리들이야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담임목사를 위한 성도들의 간절한 중보기도, 성도들을 위한 담임목사의 간절한 중보기도는 서로를 세우고, 서로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나타내는 은혜의 도구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가족, 이웃, 나라와 민족,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을 위한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누군가의 중보 기도를 받는 중보기도의 수혜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를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해주는 ‘중보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으십니까? 만약 없으시다면, 지금이라도 나와 우리 가정,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는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나의 중보기도자로 삼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2월 5일 목회 서신


샬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기도의 능력에 관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가 가진 중요한 기능 중에 한 가지는기도하는 사람의 잠재력을 개발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잠재력까지 알아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이 어느 누군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전한 한 마디의 예언적 말을 통해서, 한 사람의 인생이 행복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21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1억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영향력을 남긴 복음주의 설교가는 바로빌리 그레이엄 목사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너무 개구쟁이라서 많은 말썽을 부렸고, 늘 부모님의 걱정거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동네 할머니 한 분이 그의 어깨를 짚으면서 이런 한 마디 예언적 말씀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얘야, 너는 참 똑똑하고 유난히 말을 잘 하니 설교가가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겠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할머니가 자신에게 해 주신 이 한 마디 예언의 말씀을 빌리 그래함은 자신의 마음에 품게 되었고, 결국 신학 공부를 하고, 세계적인 전도자, 설교자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 또 하나의 깊은 삶의 족적을 남긴 분 중에는, 감리교의 창시자라고 불려지는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라는 분이 계십니다. 영국 국교회 목사의 아내였던 수산나 웨슬리는 무려 19명의 자녀를 낳아서 모두 훌륭하게 양육하신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셨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신앙인 이라면 훌륭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고, 훌륭한 가정은 아이들에 대한 가정교육에 달렸다는 신념으로 다음과 같은 교육 원칙을 세우고, 날마다 실천하셨다고 합니다: 1. 간식 엄금 2. 전원 여덟 시에 취침 3. 개인의 의사 존중 4. 아이 전원을 하나님께 인도 5. 말하기 시작하면 기도부터 가르침 6. 가정예배 때는 절대 정숙 7. 떼쓸 때는 아무것도 주지 않기 8. 잘못을 고백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고백하지 않은 잘못은 반드시 벌한다 9. 부모나 아이들이나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 10. 부모의 채찍을 두려워하며 부모의 훈계를 고맙게 여기게 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한 믿음과 삶의 원칙을 세우고 사셨던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수산나 웨슬리’, 그런 어머니의 입에서 과연 어떤 말씀들이 쏟아져 나왔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시고, 그 예언자적 말씀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말해주면서, 미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 안에서 설계하도록 도와주지 않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은 기도를 통해서 성숙된 믿음과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 자신의 신앙 공동체원들, 그리고 이웃을 살리는 은혜의 도구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그 생명을 살리는 은혜의 도구로 쓰임 받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은혜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항상 함께하십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1월 29일 목회 서신


샬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가운데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믿음과 삶의 전쟁은 보이는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내면의 적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싸워야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저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게으름과 편안함, 나태함에 중독되어 살아가지 않습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이 바더되는 것도 싫어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편안한 삶을 불편하게 간섭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적당하게 예수님을 믿고, 적당하게 교회 일에 헌신하고, 적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은 가장 크고 많이, 그리고 천국에 가서는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영광스러운 상급의 자리인 주님의 오른편 보좌에 앉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자세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신앙의 자세라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 않은 교인들보다는 낫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다니는 분명한 목적도 없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고민도 없이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그런 분들이 없으시지만, 그런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마귀사탄의 음모들을 깨뜨릴 있겠습니까?

 반대로, 편안하게 안주하며 자신만의 믿음의 틀에 갇혀서 신앙 생활을 하는 교인들,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가까이 하지 않는 교인들을 굳이 악한 마귀들이 건드려 놓겠습니까? 그냥 가만히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어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 가는데,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겠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는 성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생활에 적용하며 살려는 성도들을 보면, 악한 마귀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거룩한 삶을 방해하지 않겠습니까? 악한 마귀들이 기도와 찬양의 능력,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데,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니, 오늘도 온갖 계략과 음모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려는 성도들을 방해하고, 고난과 어려움을 주던지, 아니면 편안함과 나태함을 주던지, 그것도 아니면 우리 마음과 생각속에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의심을 심어놓던지,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 집착하게 만들어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들과 가족들, 그리고 우리 교회를 오늘도 지키는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들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바쁜 시대 상황과 어려운 환경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지만, 그래도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항상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사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의



2017년 1월 22일 목회서신



샬롬! 오늘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7:20절에 말씀하신 ‘겨자씨의 비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겨자’를 성서학자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많이 자생하는 ‘브라시카 니그라’라는 식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겨자 씨의 크기는 겨우 눈에 보일 정도로 너무 작은 것인데, 자라면 3~5m의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서 ‘겨자씨의 비유’를 단순히 ‘우리가 가진 믿음의 크기’로 생각하시는데, 예수님이 강조하신 핵심은 사실 ‘우리가 가진 믿음의 생명력’에 관한 것입니다. 씨앗의 크기 (Size)와 상관없이, 그 씨앗이 자라서 식물이나 나무, 혹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씨앗이 ‘살아 있는 씨앗인지, 혹은 죽어 있는 씨앗인지’ 그 생명력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 7월에 멕시코 Merida 지역으로 단기 선교를 갔을 때, 선교 활동을 마치고, 마지막 날 주변 지역 관광을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단기 선교 보고를 드렸을 때 사진을 통해서 보신 기억이 나실지는 모르지만, 세노테라는 관광 유적지(석회암 암반이 함몰되어 지하수가 드러난 천연샘)를 몇 군데 들렸습니다. 천연 석회석 동굴 밑에 고여 있는 파란색 지하수도 아름다웠지만, 사실 저의 시선을 끈 것은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었습니다. 암반, 즉 바위로 이루어진 주변 동굴 지역에서 물을 흡수하기 위해서, 절벽 위에 있는 나무들이 그 바위들을 뚫고 뿌리를 물이 있는 곳까지 10미터 이상씩 내린 것을 보면서, 강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뿌리의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오래 전에, 바람과 새들, 혹은 곤충들을 통해서 나무의 씨앗들이 그 지역에 옮겨졌고, 그 척박한 환경의 암반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 씨앗들은 암반 사이에 있는 얼마 안되는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강한 생명력으로 바위들 틈 사이, 혹은 약한 바위 부분을 깨뜨리면서 뿌리를 내리고, 물이 있는 세노테까지 수십년, 수백년에 걸쳐서 나무의 뿌리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 생명력의 산실이 바로 그 세노테 절벽 여기 저기에 병풍처럼 걸려있는 나무와 멋진 나무 뿌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생명력이 있는 씨앗은 수 년, 수십년, 혹은 수백년에 걸쳐서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 삶 속에, 가정 속에, 교회 안에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과 기도의 씨앗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초스피드로 자라서 우리에게 금방 생명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어떤 기도의 씨앗은 믿음의 깊은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까지 수개월, 혹은 수십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기도의 씨앗은 우리가 매일의 삶을 통해서 심는 것이지만, 그 믿음과 기도의 씨앗을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해주시는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생명력을 가진 기도의 씨앗을 심었다면, 그 기도의 씨앗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생명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포기하지 않는 믿음과 끈질긴 기도의 씨앗을 심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1월 15일 목회서신


     샬롬! 주님의 은혜와 평안이 여러분들의 삶에 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골로새서 4:2절 말씀,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에 대한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성도들이 기도를 할 때, 중도에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여 포기하거나 회의에 빠져 그만두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일관되게 지속해 나가라”는 실천적인 영적 권면을 줍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는 기도할때, “감사함으로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까? 왜 ‘기도’와 ‘감사’는 성도들과 분리할 수 없는 영적 덕목들이 됩니까? 


     감사가 선행된 기도가 바로 우리 믿음의 확신을 증명하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간구 기도에 하나님이 지금 응답해 주실지, 아니면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그것도 아니면 영원히 침묵하실지 모르는 상황속에서도, 우리는 왜 오늘도 기도를 드립니까? 선하신 하나님이 비록 우리가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기에 우리는 미리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감사가 선행될 때, 우리는 이미 나와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6년 한 해도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건강하게 지켜주신 은혜, 우리 자녀들과 생업을 보호해 주신 은혜, 그리고 우리 교회를 지켜 주신 은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경건의 훈련과 연단의 덕목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절의 마지막에 사도 바울은 ‘깨어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깨어 있으라’라고 번역된 헬라어 ‘그레고룬테스’는 “주의를 집중하여 조심하며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그레고류오’의 현재 명령 분사로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일상 생활에서 깨어 있으라는 단독 명령이 아니라 항상 힘쓰는 기도에 깨어 있으라는 명령”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시대에 성벽 위의 파수꾼이 망을 보는 상황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파수꾼의 사명은 적군이나 무역상들이 자신들이 지키는 성에 다가올때 가장 먼저 발견하고, 그것을 보고하고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 적군이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수꾼들은 늘 깨어서 망을 보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자, 구약 시대의 파수꾼들에게 ‘깨어 있으라’라는 단어가 이런 뜻이었다면, 오늘날 21세기 시카고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라는 의미는 어떤 영적 권면을 주는 말씀일까요? 오늘 우리가 영적 파수꾼이 되어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오감뿐만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눈과 귀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영적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 영안을 열라는 것입니다. 


     항상 힘쓰고 기도하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안을 열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은혜의 기회들을 잡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악한 마귀 사탄의 간교와 술책을 깨닫고 부숴버려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듣게 되는 음성들, 또는 꿈과 환상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기도의 제목들중에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주신 것들도 있지만, 악한 영인 사탄이 주는 거짓되고 위선된 음성과 환상과 기도 제목들도 있다는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에 항상 깨어 있어서 영안이 열리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우리가 꾼 꿈이, 그리고 우리가 가진 확신이 하나님의 영이 주신 것인지, 아니면 악한 영에 의해서 우리 인간의 본성과 죄와 욕심에 의한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안이 열려서 그러한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불만족과 불신, 의심과 불평, 그리고 교회 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원인들이 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성도들은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서”, 마귀가 주는 이러한 교묘하고 악랄한 전술을 깨닫고, 대적할 수 있는 영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한 마귀의 계교와 간교한 전략을 타파해야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명확한 뜻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고, 우리가 드리는 간구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을 나타내는 은혜의 도구들이 될 수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처럼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과 은혜의 기회들을 붙잡고, 누리며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1월 8일 목회서신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대기업중의 한 회사인 포드사의 창립자 헨리 포드, 그는 ‘미국의 자동차 왕’이라는 호칭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자동차 대기업 ‘포드사 ’를 세운 후에, 자신의 고향에 크지 않은 집 한 채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작은 집은 엄청난 부와 명성을 쌓은 자동차 대기업 총수가 살기에는 매우 빈약하고, 평범해 보이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은 너무 작고 초라하지 않나요. 호화로운 대저택을 짓지는 않더라도 살기에는 불편함이 없는 집을 지으셔야 하지 않을까요?”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 때, 만면에 웃음을 띤 헨리 포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집이지요.” 오늘날에도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 시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 가면 이런 글귀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헨리 포드, 그가 자신이 꾼 큰 꿈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뒤에서 말없이 항상 기도하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7년 정유년의 새해 벽두부터 우리 교회는 ‘전교인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추운 날씨와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많은 분들이 신년 초부터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 나와서 새벽마다 부르짖어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작하기 전에는 “과연 우리가 이 추운 겨울에 여러가지 좋지 않은 여건하에서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를 드릴 수 있을까?”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린게 아닐까!”라는 일말의 걱정이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새벽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함께 은혜를 받고,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여러 성도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마음속에 큰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안에서 항상 기도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놀라운 기도의 응답과 기적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령안에서 항상 연합하여 기도하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적을 나타내시는 은혜의 도구로 사용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연약한 마음으로 생각할 때는, 우리의 연로함이, 우리 육신의 연약함이, 우리가 처한 현재의 좋지 않은 상황과 어려운 환경들이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이 나이에, 이 조건속에서 하나님의 기적과 영적 부흥을 이룰 수 있을까?”라는 부정적인 생각과 불신앙의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기도하면, 악한 영들과의 영적 싸움에 담대히 임하면, 우리가 가진 연약함과 불신앙과 의심의 마음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기적의 확신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이룰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연합하여 함께 기도하는 이 40일간의 영적 여정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DNA를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영적 DNA를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이 글을 지금 읽고 계신 여러분들도, 성전에 나오시든지, 아니면 여러분들이 계신 삶의 자리에서 매일 아침 6시에 눈을 떠서, 한 성령 안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는 성도들이 자동차 왕 헨리 포드처럼 인생의 진정한 성공을 거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


2017년 1월 1일 목회 서신



     2017년 정유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매년 맞이하는 송구영신 때는 인종과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지나간 한 해를 아쉬워하면서, 새로운 해에 이루고자 하는 소원과 결심들을 종이에 적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New Year Resolution(신년 결의서)”라고 부르며, 미국 교회들 중에서 전통적으로 이러한 행사를 신년 첫 주에 하는 곳도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어제와 오늘, 지나간 2016년을 돌아보시면서 아쉬움과 후회가 교차하는 감정을 정리하시고, 이제 새로운 한 해 동안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살아가실지를 결정하셨습니까? 2017년에는 무엇을 이루고, 어디를 가보고 싶고, 어떻게 하루 하루를 살고 싶으십니까? 올 한해 동안 우리가 이루기를 원하는 마음의 소원과 바램이 아마도 우리 각자의 마음과 생각 속에 한 두 가지씩은 있으실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기는, 우리 교우님들 한 분 한 분이 바라고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이 올 한해 동안 주님 안에서 모두 이루어 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의 가정과 하시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가운데 늘 형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러한 삶과 믿음의 형통함을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비밀 한 가지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시편 37:4~6절에 보시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017년 한해 동안 우리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이 걱정 없이 살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성공과 번영과 형통함의 은혜를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2017년 올 한 해 동안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자녀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생각하고 꿈꾸는 모든 일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믿음 생활을 하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여호와께 맡기면 우리 마음에 있는 소원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힘과 지혜, 내가 가진 물질과 능력과 다른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의 삶을 빛 같이 빛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그 누구도 보장해 줄 수 없는 100% 성공 보장서가 우리 앞에 있는데, 왜 우리는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의심하고 다른 세상의 방법들을 신년 초부터 찾고 계십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떠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확실한 성공의 법칙에 따라서 2017년 한 해를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선택은 언제나 저와 여러분의 몫입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대로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냐는 우리의 선택의 몫이고, 그 선택의 결과는 2017년 한 해가 마무리 되는 때에 우리 삶의 열매들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지혜로운 믿음의 선택을 통해서, 올 한해도 주님 안에서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 그리스도의 종 -


2016년 12월 25일 목회 서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늘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이 땅에 전해준 크리스마스입니다. 2016년 전 오늘, 베들레헴 말구유 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주(the Messiah, the LORD)”셨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날입니다. 


     크리스마스의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로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 해 크리스마스 때마다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를 좀 더 명확하게 깨달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기 예수님, 즉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예배는 이 자리에서 드리는 한 시간 남짓의 예배 의식으로만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18~19절에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 성도들은 바로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본받아서, 그분이 맡겨주신 사명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크리스마스 예배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매일의 삶을 통해서,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을 주고 받으며, 가족간의 사랑을 나누는 것도 참 소중한 문화 전통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과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무언가에 얽메여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포로된 삶을 사는 자들에게, 무언가에 눌려서 아기 예수님이 전하신 은혜와 사랑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바꿀만한 완벽하고 놀라운 기적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주변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웃들과 그 누군가에게 따뜻하고 작은 정성을 전할 수는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Homeless에게 전하는 $1달러짜리 지폐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공허함 속에서 살아가는 그 누군가에게 전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포옹이 아기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 땅에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해진 이 크리스마스에, 어떠십니까 여러분? 크고 놀라운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우리가 우리 일상에서 만들 수 있는 작은 기적을 실천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땅에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전령들이 해야 할 사명이 아닐까요? Merry Christmas to YOU! 

-그리스도의 종-



2016년 12월 4일 목회서신



대림절(대강절)의 라틴어 어원은 “어드밴트: Advent”입니다. 이것은 “곧 도착할 손님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단어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다리는 곧 도착할 손님은 바로 “아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세기 서방교회에서부터 지키기 시작한 대림절, 오늘날에는 성탄절 이전인 4주 전부터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11월 마지막 주일서부터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대림절 첫번째 주일은 “오실 구세주를 깨어서 기다려야 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자세를 강조”하고, 대림절 두번째 주일은 “구세주의 오심에 대비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대림절 3번째 주일은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기뻐하라고 권고”하며, 마지막 4번째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와 그분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로서 “구세주의 오시는 길을 대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던 사도 요한의 말씀을 살펴보는 날입니다. 회개란 단어의 한자어 뜻을 살펴보면, ‘뉘우칠 회’에 ‘고칠 개’인데, “마음으로 뉘우쳐서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행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일류 소설가와 삼류 소설가의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삼류 소설가는 자신이 배워서 아는 것, 자신이 취재하고 모은 모든 정보들을 자신의 소설 속에 집어 넣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이 소설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정확한 주제를 나타내지 못하고, 산만하고 초점이 없는 글을 쓰게 됩니다. 반면에 일류 소설가는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소설의 주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아는 것이 수없이 많고 자료들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면서 절제된 언어로 글을 씁니다. 


그런 까닭에, 일류 소설가의 소설은 늘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위대한 작품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대비하면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의 죄를 깨닫고 진실한 회개를 해야지만 우리가 버릴 것은 버리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일류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 아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며 회개해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것은 ‘자복’입니다.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끊어 버리고, 이전까지 해왔던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끊어버려야 할 죄의 사슬이 무엇입니까? 이 대림절 기간 동안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끊어버려야 할 것들을 끊어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고, 나누어야 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누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 그리스도의 종 -



2016년 11월 27일 목회서신



샬롬!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모든 교우님들의 삶 가운데 넘치시기를 기도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2016년 추수감사절 연휴를 보냈습니다. 어떻게 여러분 모두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감사의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우리가 오늘도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 드리는 그런 소중한 시간들을 보내셨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서부터 우리는 2016년 대림절(대강절, 강림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님,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대림절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오직 성탄절(Christmas) 에 집중을 합니다. 더욱이 안타까운 현실은 성탄절의 주인인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그 날에, 어느덧 산타클로스가 주인이 되어서, 주인 행세를 하는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한 해 동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면서 산타클로스로부터 선물을 받기 원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책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아기 예수님임을 우리 사랑하는 믿음의 후손들에게 훈계해주어야만 합니다. 

대림절의 라틴어 어원은 “어드밴트: Advent” 입니다. 이것은 “곧 도착할 손님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단어 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다리는 곧 도착할 손님은 바로 “아기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4세기 서방교회에서부터 지키기 시작한 대림절, 오늘날에는 성탄절 이전인 4주 전부터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11월 마지막 주일서부터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대림절 첫번째 주일은 “오실 구세주를 깨어서 기다려야 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자세를 강조” 하고, 대림절 두번째 주일은 “구세주의 오심에 대비하여 회개를 촉구” 하고, 대림절 3번째 주일은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기뻐하라고 권고” 하며, 마지막 4번째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와 그분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오늘서부터 시작되는 이 기다림의 절기에 여러분들은 어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곧 오실 재림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그분만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그리스도의 종 -



2016년 11월 20일 목회서신


2016년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감사로 가득 찬 이 날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감사 드리길 원하십니까? 사랑하는 배우자와 부모님, 혹은 자녀들에게 어떤 감사의 말을 전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어떤 감사의 인사를 전하길 원하십니까? 담임목사로서 저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섬김과 봉사 덕분에 우리 중앙연합감리교회가 지난 한 해 동안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여러분들의 헌신임을 기억하면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영적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지난 11개월을 돌아보시면, 저와 여러분 모두의 삶 속에서 “범사에 감사할 조건들”이 아마도 흘러 차고 넘칠 것입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은 내 삶의 환경이 더 나아지고, 내 경제적 여건이 더 좋아지고, 내 믿음이 더 좋아졌을 때 감사를 드리는 자가 아니라, 지금 내 삶의 환경과 처지와 믿음이 어떻든지 간에 상관없이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감사가 넘쳐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끝으로 신원 미상의 작가가 쓴 ‘항상 감사하기’라는 시를 소개해 드리며 목회 서신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내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파티를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 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 아줌마의 엉터리 성가가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이 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지요.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일궈진 불평, 불만들, 바꾸어 생각해보면 또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의 종 -



2016년 11월 6일 목회 서신


“샬롬! 

하늘로부터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사랑하는 교우님들의 마음과 삶 속에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에 저희 교회는 40주년 기념 부흥성회와 임직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모두 그 부흥 성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셨습니까? 아니면 평소에 그리워하던 전임 목사님을 만나 뵈어서 그냥 좋았고, 좋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셨습니까? 부흥회를 통해서 어떤 은혜와 감정을 느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리 개개인이 받은 은혜도 다르고, 느낀 감정과 생각도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성찬 목사님을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들이 아마도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들이 우리 심령속에서 거친 바다를 잠잠케 할 수 있는 큰 믿음이 되었든지, 아니면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믿음이 되었든지 간에, 우리의 심령속에 작은 믿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우리의 마음속에 뿌려진 그 작은 믿음의 씨앗을 어떻게 가꾸고, 어떻게 보살펴서,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들을 맺느냐고 우리에게 남은 숙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 믿음과 은혜의 씨앗을 가꾸시겠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작은 팁(Tip) 한 가지를 알려 드려도 될까요? 

디모데 후서 4:7-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치열한 영적 싸움을 살던 믿음의 선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날마다 선한 싸움을 싸웠는데, 매순간 순간마다 그가 마음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믿음의 걸음을 걸었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 영적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으면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자조 썩인 믿음의 고백을 다 했겠습니까? 자, 제가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릴려고 하는 믿음의 팁(Tip)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밭에 심겨진 은혜와 믿음의 씨앗을 어떻게 잘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매일의 삶 속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악한 마귀 사탄과 우리 자신들과 영적 싸움을 싸우며, 성숙한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싸움이 너무 치열하고 힘들어서 때때로 실족하여 넘어질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의지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오늘도 내 죄된 본성과 세상의 가치들과 싸우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성화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우면 싸울수록,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의 씨앗이 자라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큰 믿음의 나무들이 우리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싸움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믿음의 씨앗이 자라게 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한 밑가지가 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 매 순간 순간마다 그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걷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성화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신비, 은혜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 노력으로 할려고 하면 할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영을 의지하면 가능합니다. 지금 당장 무언가 모를 큰 기적을 경험하고, 누구에게나 자랑할 수 있는 아름답고 큰 열매를 맺고 싶은데, 그러한 놀라운 기적들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처럼, 그냥 담담히, 변함없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꾼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쓰고 영생의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럼 오늘 당장, 지금부터 여러분이 서 계신 그 자리에서 성령님을 의지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며 성실히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와 동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영원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2016년 10월 23일 목회 서신


“미국의 한 실업자가 이 회사, 저 회사를 다니면서 직장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회사 문 앞에 ‘Push(미시오)’ 라고 써 붙인 것을 보고 문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그 때 그 회사 지배인이 “왜 들어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는 “저 문에 밀고 들어오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지배인이 “당기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 위해 ‘미시오’ 라고 써 붙인 것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나는 직장을 구하고 있습니다. 저 문에 쓰어 있는 ‘미시오’라는 글을 보는 순간, 내 인생을 맡길 만한 문이라고 생각되어서 문을 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제게 일자리를 주십시오.” 젊은이의 말에 감동한 지배인은 이 젊은이를 그 자리에서 채용하였다고 합니다.” 

익명의 사람이 쓴 이 글을 보면서, 우리는 적극성과 간절함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교훈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녀들로서, 우리 인생에서 더 소중하고 꼭 필요한 무엇인가를 구하고 찾고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7-8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린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린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얻기를 원하고, 찾기를 원하고, 두드리기를 원하는 것들은 세속적인 가치들과 우리의 육신을 위한 어떤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제 한 주가 지나면, 우리가 기다려 왔던 40주년 기념 부흥성회가 시작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두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가지신 삶의 근심과 걱정, 무거운 짐들을 하나님 앞에 먼저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간구하시고,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연약함 들을 치료받으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기도 가운데 비우시고,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맛보기 위해서 믿음의 그릇을 더욱 확장시키십시오. 그리고 결단하고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은 간절하게 구하는 자에게, 간절하게 찾는 자에게, 간절하게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그분의 놀라운 은혜와 비밀을 드러내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 내리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이번 부흥 성회 동안에 경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종-


2016년 10월 16일 목회 서신


어느덧 제법 쌀쌀한 가을 기온이 우리의 몸을 움츠려 들게 만드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한 이 환절기에 교우님들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나뭇잎들이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이 10월에, 우리 교회는 40주년 기념 부흥 성회와 신천 장로-집사 취임식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모두 기도로 깨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사모하고 계십니까? 거듭 강조해서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은 이미 흘러 차고 넘치는 성령충만의 은혜를 이번 40주년 기념부흥성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단, 저와 여러분들이 그 은혜와 복을 충분히 담을 만큼 믿음의 그릇들을 준비해 놓는다면 말입니다. 야고보서 4:14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의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 연약한 인간은 당장 내일 일을, 아니 10분 후에 우리 앞에 벌어질 일도 가늠하지 못하는 유한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깨닫는 인생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은 우리 바램과는 달리 항상 악한 마귀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만큼 강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능력이 필요한 인생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6: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영적 교훈처럼, 지금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의 은혜가 필요하고,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분주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매일같이 말씀과 기도로 경건의 훈련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이번 부흥 성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흘러 차고 넘치게 부어주시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경험하고, 첫사랑의 은혜를 회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남은 2주 동안에,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서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번 40주년 기념 부흥 성회를 통해서, 나와 우리 자녀들이, 우리 교우님들이 모두 성령충만함의 은혜를 받아서, 구원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마음의 소원을 아뢰고, 김성찬 목사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간절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놀라운 비밀을 보여주시고 풍성한 은혜와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2016년 9월 25일 목회 서신


살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 중앙연합감리교회의 40주년 기념 부흥 성회가 약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파란 하늘이 우리에게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에 산으로 바다로 놀러 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우리는 이 시원한 계절에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만나는 영적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2016년 올 해 제가 뽑은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 전서 4:7-8절 말씀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지난 송구 영신 예배 때 받은 말씀 카드를 제 성경책에 고이 간직하고, 매일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저는 제가 과거에 습관적으로 암송해 오던 말씀만을 생각하며 그 말씀 카드를 보았습니다. 제가 과거에 기억하던 그 말씀은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습하라”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평상시와 같이 올 해 말씀 카드를 읽던 중에 “네 자신을 연단하라”라는 말씀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영적 깨달음을 얻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연습하다’와 ‘연단하다’의 동사는 어떤 의미의 차이를 가집니까?

국어 사전의 정의를 찾아보면, ‘연단하다’라는 단어의 뜻은 나오지 않고, 비슷한 말로 ‘단련하다’라는 동사의 뜻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연단하다’는 곧 ‘단련하다’라고 바꾸어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국어 사전에 나온 ‘단련하다’의 뜻을 살펴보면, 보통 세 가지 정도의 의미가 소개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쇠붙이를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단단하게 하다”, 두 번째는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어떤 일을 반복하여 익숙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국어 사전에 나온 ‘연습하다’의 뜻은 “학문이나 기예 따위를 익숙하도록 되풀이하여 익히다”라는 뜻입니다. 두 동사의 어감과 뜻을 비교해 보아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 번역본 상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네 자신을 연단하라”는 사도 바울의 그 강한 영적 권면이,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영적 교훈임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경건의 훈련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굳세게 지키는 것이 곧 경건의 훈련입니다. 매일 매일 성령 안에서 깊이 기도하며, 우리 육신의 정욕과 죄악들을 성령의 불로 태우고, 우리 영혼을 달구고 두드려서 하나님의 정금 같은 도구로 단련하는 것이 경건의 훈련입니다. 그러한 영적 훈련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익숙하게 만들어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악한 마귀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경건의 훈련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경건의 훈련이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자, 왜 제가 이런 영적 교훈을 여러분들에게 살짝 귀띔하는지 이제는 이해하셨습니까? 40주년 기념 부흥회까지 앞으로 남은 한 달 동안, 우리 모두가 더 열심히, 더 깊이, 더 뜨겁게 우리 자신을 경건의 훈련으로 연단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으로, 성령의 뜨거운 기도의 불로, 그리고 금식과 다른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영적으로 단련하기를 소망합니다. 준비된 자만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 충만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다가오는 부흥회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 충만의 역사가 우리 머리 위에, 우리 가정과 교회 위에 흘러 차고 넘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 후서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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